Heiligen Krieg ─ 1장

 『그 남자와 대면했을 때 나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중략)……내 눈길을 끈 것은 전신에 난 흉터였다. 그가 겪어온 전장은 정말로 현세에 존재했던 것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옥에라도 다녀온 사람 같았다.
 목이 떨어지는 것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안도감을 느꼈다. 패배자에 불과한 내가 집착할 생명이 어디에 있을까. 마음을 다잡고 입을 다문 채 말하기를 거부했지만, 그의 인내와 살고자 하는 욕망이 나의 신념을 이겨버리고 말았다.
 "다시 한번 묻지. 슬라가파의 지장, 다이어여. 내 수하가 되어라."
 나는 그 말에 이렇게 대답했었다.
 "나는……, 살고 싶어. 하지만, 당신의 도구가 되는 것은 사양하지."
 대답을 듣고 만족했는지 그는 씩 웃으며 내 목에 드리운 도끼를 치웠다. 그 뒤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지금도 생각한다. 내가 죽음을 원했다면, 그는 과연 그 도끼로 목을 내리쳐 주었을지.
 ─대륙력 300년 겨울. 전우들이 고이 잠든 북서 땅에서.』
 
Heiligen Krieg
1장/ 바람이 지는 동쪽


'당신이 보이지 않아.'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가
그의 눈을 적셨다.
샤르미나가 옷깃을 찢어
닦아주었지만, 그는 결국 연인의 얼굴을
되새겨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1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려 대지를 적시는 순간 샤르미나 로체는 붉은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지휘봉을 휘둘렀다.
 "전구운. 돌격!"
 총사령관의 명령에 이프리트 북부군은 방진을 유지하면서 라카마이다 평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정찰병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장교들에게 전진 신호를 날렸다. 이프리트를 상징하는 불꽃과 검이 그려진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병사들의 창대는 하늘을 찌를 듯이 들어 올려져 있었다. 북부군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대장. 형수님이 출동하셨습니다. 어쩌시렵니까?"
 전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바위에 걸터앉아 가죽을 덧댄 도낏자루를 쓰다듬던 청년은 부하가 내뱉은 말에 눈을 크게 뜨며 응징의 주먹을 날렸다.
 "짜샤. 아직 뽀뽀도 못해봤는데. 죽고 잡냐?"
 "컥. 시, 시정하겠습니다."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구는 부하를 상큼하게 무시한 청년은 북부군의 전개 양상을 지켜보았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는 북부군은 질서정연하면서도 신속했다. 저 멀리 느릿느릿 다가오는 루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청년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가지고 놀던 토마호크를 허리에 찼다.
 "야."
 "네. 대장."
 "한 시간 줄게. 루인 녀석들의 후장을 따버려."
 청년의 말에 기겁한 부하는 뒷걸음질치면서 '저는 게이가 아닌데요.' 따위의 소리를 지껄였다. 청년은 또 다시 응징의 주먹을 날렸다.
 "이새키 도끼질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적혈마 데리고 왔잖아! 그거 타고 날아가서 저 얼음땡이들을 화끈하게 지져주라고! 앙?!"
 그제야 상관의 명령을 이해한 부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둥지둥 달음질쳤다. 그러나 그 부하는 꼭 한마디가 많았다. 그는 뒤뚱뒤뚱 뛰어가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대장은 형수님한테만 상냥하지 말입니다!"
 그 말에 혈관이 튀어나온 청년은 토마호크를 붕붕 돌리면서 고함쳤다.
 "너 나중에 보자아아!"
 아무튼, 이프리트와 루인 간에 라카마이다 평원을 건 회전이 시작되었다.

 샤르미나는 흔들리는 안장 위에서 간신히 몸을 고정했다. 그녀는 말을 타는 일에 익숙해 보이지 않았다.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해 오른쪽으로 쏠려 떨어질 뻔하거나, 말 목에 매달리는 등 총사령관으로서 위엄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북부군은 그녀를 신뢰했고, 또 고향에 두고 온 딸내미를 보는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손이 비는 정찰병들이 종종 그녀의 곁을 맴돌며 낙마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을 보았다면, 전부 짐작해볼 수 있는 속사정이다.
 북부군은 로체 가문의 사병단에서 출발한 독특한 집단이다. 야행성 도마뱀인 샬레마를 가문의 상징으로 삼는 로체 가문은 암살과 모략에 특출난 집안이다. 그런 만큼 그들은 주변에서 공격을 자주 받았다. 의뢰주들은 그들의 암살 기술에 겁을 집어 한번 써먹은 다음에 역으로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그래서 로체 가문은 항상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자신의 몸을 지킬 방패가 필요해졌다.
 로체 가문은 지독했다. 그들은 대를 이어서 쫓기는 마당에도 끊임없이 의뢰를 받으며 돈을 벌었고,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막대한 부를 가지고 하얀늑대 부족 일부를 고용해 가문을 호위하는 군대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현 북부군의 시초가 된다.
 이프리트 부족은 그런 로체 가문을 눈여겨보다가 결국 그들을 받아들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으며, 생활이 안정되자 본업을 버리고 군에 투신한다. 샤르미나는 로체 가문의 차녀로서 북부군에 종사하는 것이다.
 "총사령관 각하!"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정찰병이 급히 달려와 샤르미나에게 두루마리를 건네주었다. 가볍게 경례하는 것으로 다시 달려나가는 병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샤르미나는 끈으로 묶인 두루마리를 풀어 보았다.
 「나의 샤르미나.
 귀염둥이 도끼들은 예정대로 얼음땡이들의 배후를 칠 겁니다. 샤르미나가 절구가 되고 내가 절굿공이가 되는 거에요. 그럼, 부디 무사하길 빌어요.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 크림슨액스의 대장 럭시 발레이가.」
 "……럭시."
 샤르미나는 볼에 한가득 홍조를 띄웠다. 그리고 럭시가 보내온 두루마리를 품 안에 고이 접어 넣고서 고삐를 움켜잡았다.
 "전려엉!"
 총사령관의 호명에 근처에 있던 정찰병이 잽싸게 말을 몰고 다가왔다.
 "좌군과 우군에 전하도록 하세요. 얼음을 녹일 화로를 만들어라. 중군은 이대로 전진. 불은 크림슨액스가 피워줄 것이다. 가세요!"
 "하!"
 정찰병은 목례조차 하지 않고 방향을 돌렸다. 샤르미나는 다시 한번 지휘봉을 흔들었다. 바로 눈앞에 얼음의 군대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손에 땀이 차는지 몇 번이나 고삐를 놓칠뻔했다.
 루인 부족의 군대는 그 분위기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스산했다. 새카만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은 산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죄악의 업화를 뚫고 온 죽음의 군대를 보았소?' 라고 묻는다면 틀림없이 그들을 지목할 것이다. 샤르미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동 속도를 늦추라는 지시를 내렸다. 왜냐하면, 적이 움직임을 온전히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샤르미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사태에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대응했다. 단단한 벽에 돌진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벽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진군을 멈추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로 했다. 이미 좌군과 우군이 이동해있을 터다.
 '공격 개시의 타이밍은 그에게 맡기자.'
 그리고 이것이 이프리트 부족이 동 대륙 장악하는 동안 명성을 떨쳤던 불패 전략가 샤르미나 로체의 마지막 실수이기도 했다.

 "멍청하진 않군. 하지만, 생각이 짧아. 대단위 전투 경험이 없는 건가?"
 다니엘은 흉흉한 살기를 적에게 쏘아내며 애마 로른의 갈색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는 흑색의 흉갑을 입고 뿔이 달린 투구를 썼으며. 등에는 커다란 대검을 매었다. 사령관인 그는 적의 신속한 대응에 감탄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가 손을 들자 루인의 군대는 반전하기 시작했다.
 "사령관. 예상대로군요."
 부사령관인 류카라한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북부인치고 제법 찰랑대는 머릿결을 가진 그는 다니엘 사령관에게 윙크했다. 다니엘은 그에게 사납게 대꾸했다.
 "노예 부대의 운영을 맡겼을 텐데. ……류카라한 디 로이페."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쓰고 버릴 것들입니다. 이제 우리 뒤를 치려고 달려오는 얼간이들을 잡아먹으면 되는 겁니까?"
 류카라한은 촐랑대면서 다니엘의 말을 끊어먹었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아니면 천성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행동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매섭게 불던 바람이 갑작스레 사그라졌다. 다니엘은 아직 반응하지 않는 적을 힐끔 쳐다보고는 등을 돌렸다. 그가 노리는 것은 배후를 치기 위해 다가오는 크림슨액스였다.

 샤르미나는 애를 먹고 있었다. 이제 막 포위진이 완성되어 가는 마당에 루인의 군대가 후퇴하면서 병력 일부를 남겨 북부군의 이동을 방해하는 인의 장벽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전령을 부리며 상황 타파에 힘썼다. 이대로 가다간 크림슨액스는 전멸하고 말 터이다.
 "좌군 지휘관이신 바소 경의 전갈입니다! 좌군은 방추진으로 적을 분쇄! 중군의 길을 열겠다고 하십니다!"
 멀리서 정찰병이 고함을 질렀다. 샤르미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지휘봉을 흔들었다. 좋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좌군이 길을 뚫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우군은 현재 침묵 중. 결국, 그녀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로베르토 경!"
 샤르미나는 부관을 불렀다.
 "네!"
 고수 머리의 사내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명령을 기다렸다.
 "기마병 오천 기를 주겠어요. 적을 돌파해서 크림슨액스를 원호하세요!"
 "알겠습니다! 이랴!"
 총사령관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로베르토는 말을 몰아 전령과 함께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샤르미나는 그에게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나머지 중군을 움직여 전진하도록 했다. 그녀는 초조했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붉은빛이 감도는 털을 가진 말이 대지를 박차고 날았다. 그야말로 날았다고 하는 말 외에는 다른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다. 이프리트 부족 최강의 백병전 달인인 크림슨액스는 얼음땡이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기 위해서 신나게 달렸다. 그들에게는 마치 바람의 신탁이 내려온 듯 했다.
 럭시 발레이는 흥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라카마이다 방위전에서 승전보를 가져오면 로체 가문에 혼담을 보낸다는 조건으로 전장에 나섰던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형편없었다. 따라서 승리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히이이하!"
 상쾌한 함성을 지르며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던 럭시와 그의 부하들은 저마다 등에 메고 있던 도끼를 쥐어 잡았다. 저만치서 그들을 맞이하듯이 달려오는 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주 맹꽁이들은 아닌 모양이군! 오버! 듀란! 단숨에 돌파한다!"
 "예아!"
 "대장은 형수님이 많이 보고픈 모양이십니다!"
 크림슨액스는 세 갈래로 갈라지더니 쐐기형태로 적의 중심부로 돌진했다. 그들은 얼음의 군대 앞에서도 태연하게 함성을 질렀다. 라카마이다의 대지가 이에 응하듯 울음을 토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무리가 격돌했다.

〃2
 얼음의 군대는 처음 북부군과 조우하고서 이상한 행동을 했다. 그들은 점차 진군 속도를 감속하더니 아주 멈춰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의도된 바였다.
 북부군의 전술을 꿰뚫어 본 다니엘은 부대를 나누어서 전개했다. 우선 그가 직접 이끄는 1군단은 후방에서 접근하는 크림슨액스를 상대하기 위해 움직였다. 부사령관인 류카라한은 노예로만 구성된 3군단을 운영하여 북부군의 진로를 방해하고, 2군단을 우회시켜 상대의 오른쪽 옆구리를 치도록 했다.
 이프리트 정벌군의 선봉이자 얼음의 군대라는 별명을 단 부대의 사령관인 다니엘 루는 그렇게 간단히도 샤르미나의 전술을 와해했다.
 "전부 다 쓸어버려!"
 류카라한은 창으로 어느 북부군 병사의 심장을 찔러 넣고는 안장에 달린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원래 3군단을 맡고 있어야 했지만, 지루했던 것인지 어느새 이곳에서 난전을 즐기고 있었다.
 북부군의 우익을 지휘하는 사람은 시리우스 스타 경이었다. 멋지게 콧수염을 기른 시리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전황을 파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혼란을 유도하는 루인의 공세에 당황했다. 지금쯤 적에 대한 포위가 완성되어 압박을 가하고 있었을 터인데…….
 "믿을 수가 없군."
 시리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덤벼드는 루인 측 병사의 모가지를 따버렸다. 피 분수가 솟아올라 그의 옷을 더렵혔으나 개의치 않고 다음으로 벨 상대를 찾아 나섰다.
 얼마 안 있어 시리우스는 광기에 젖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돌아다니는 적장을 발견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 망토와 온갖 멋을 들인 장식. 아무래도 차림새로 보아 어중간한 장교가 아닌 군을 움직이는 수뇌부로 보였다. 그가 찾아낸 사람은 다름 아닌 류카라한이다.
 허공에서 류카라한과 시리우스의 시선이 얽혔다. 시리우스는 상대가 강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지만, 새파란 애송이 앞에서 발을 뺄 수는 없었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은 검을 맞대었다.
 챙. 챙. 챙. 챙.
 류카라한의 검이 속임수가 많고 빠르다면, 시리우스의 검은 무겁고 또 방어적이었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류카라한의 날랜 검격을 막아낸 그는 바로 반격했다.
 심심한 검무였다. 막아내면 물러났다가 재차 공격하는 단순한 반복이다. 두 사람의 검술은 상극이어서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창이 날아왔다.
 누가 던졌는지 모르는 그 창은 포물선을 그리며, 시리우스가 탄 말의 옆구리를 찔렀다.
 히이이이힝.
 상처를 입고 날뛰는 말 덕분에 중심을 잃은 시리우스는 생에 마지막으로 씩 웃는 류카라한의 모습을 망막에 새길 수 있었다. 그는 류카라한에게 목이 잘려 죽고 말았다.

 '너무 얇다.'
 럭시는 눈썹을 팔자로 휜 채 그런 생각을 했다.
 세 개의 쐐기가 되어 얼음의 군대를 가볍게 돌파한 크림슨액스는 속도를 더욱 높여 북부군이 묶어두고 있을 나머지 적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히 우리를 저지하려 했던 건, 시간을 지연시키려는 속셈이었을 텐데.'
 확실히 럭시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샤르미나가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뒤에서 다시 접근하는 적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거기까지는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대장! 얼음땡이 녀석들이 쫓아오고 있어요! 전부 기마병?!"
 듀란은 헉헉거리며 럭시 근처에 가까스로 말을 몰아왔다. 그는 상관에게 보고하러 왔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되려 놀래서 숨을 들이켰다. 정말로 루인 부족의 기마병들이 추격에 나선 것이다.
 "곤란하군! 듀란! 작전은 너한테 맡기마! 나는 친위대와 남아서 저놈들을 막겠어!"
 "대장?!"
 럭시의 외침에 듀란은 곤란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앞에는 상관이 사랑해 마지 않는 여인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샤르미나가 중요하냐! 안 중요하냐!"
 "형수님은 소중합니다요! 대장!"
 "임마! 그럼 얼른 가라!"
 "대장이 가야죠!"
 듀란이 내뱉은 말에 럭시는 안색을 굳혔다. 돌파 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추격을 시작하는 판단력을 가진 자라면, 일개 부관인 듀란으로서는 상대하기란 어렵다. 그는 그 점을 일찌감치 알아차렸기에 머리를 흔들었다.
 "으음. 그건 안 돼! 내가 질 것 같으냐?!"
 "아닙니다!"
 "그럼! 닥치고! 가! 시발 숨 차 죽겠네!"
 욕설마저 지껄이는 럭시의 고함에 듀란은 별수 없다는 듯이 눈인사를 하고는 부하들을 통솔하여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해서 마음의 군살을 덜어낸 럭시는 손을 들어, 남은 자들에게 반전할 것을 명령했다.
 크림슨액스는 순식간에 방향과 진열을 가다듬고는 추적자를 향해 도끼를 겨누었다.
 "샤르미나가 보고 싶다아! 남자가 됐으면 뽀뽀는 하고 죽어야지이! 전원 돌겨어억! 살아서 보자 이것들아!"
 "히이이하!"
 활력이 넘치는 함성과 꿈틀거리는 생명력으로 무장한 크림슨액스는 다시 한번 얼음의 군대와 충돌했다. 이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가히 미레타 산맥에서나 산다는 호랑이란 맹수와도 같았다.

 북부군 좌익 지휘관 바소 프레신 경은 얼음의 군대가 쳐놓고 간 벽을 손쉽게 허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내친김에 잔여 세력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청소를 시작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나 적들은 하나같이 풀이 죽어 있고 기세가 약했다. 훈련된 병사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랐다.
 "노병이라도 끌고 온 건가. 잔혹한 녀석들!"
 바소는 싸울 수 없는 자를 내버리고 간 루인 부족을 욕하며 살려 달라고 비는 어느 적의 목을 쳐버렸다. 이런 자들은 대개 강자의 말에 절대복종하므로, 후환이 생기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 현명했다. 잔혹하기는 매한가지지만.
 "바소 경!"
 멀리서 전령이 달려와 잠시 숨을 돌리는 바소에게 보고를 전했다.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만, 조금 전 중군의 기마대가 정면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 소식에 바소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샤르미나 총사령관을 믿었고, 그녀의 판단이 마음을 흡족하게 했기 때문이리라.
 "알겠다. 중군에 전하도록. 좌군은 적이 놓고 간 장해물을 완벽하게 제거. 우군의 상황을 살피러 간다고."
 "네!"
 두 사람은 희망적인 관측을 했는지, 만면에 웃음을 띠며 헤어졌다. 바소는 자신의 말을 찾아 올라타고는 여기저기 흩어진 장교들을 소집했다. 그는 해야 할 일에 대한 판단이 좋았다. 다만, 너무 낙관적이었을 따름이다.

 정신없이 달리던 듀란은 멀리서 다가오는 기마병 무리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불꽃과 검이 춤추는 그림. 저것은 틀림없이 이프리트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최대한 굴려서 나름대로 가설을 세웠다.
 "어라!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나는 형수님한테 상황 보고 하러 갈테니까 니네는 재네 따라가서 대장 좀 도와라!"
 "걱정 붙들어 매쇼!"
 "꼴에 머리 쓰다가 터질 거유!"
 상당한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도 크림슨액스의 일원들은 잘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통하는 바가 있어서 듀란의 말을 금세 이해했다.
 듀란은 아군의 기마병 부대를 통솔하는 듯한 인물에게 간단한 수신호를 보내 합류의 뜻을 전했고, 상대가 흔쾌히 수락하여 크림슨액스는 기마대를 따라 반전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북부군이 있을 방향으로 계속해서 말을 몰았다. 적혈마는 주인의 기분을 받아들이고는 더욱 힘차게 달렸다.
 태양은 이미 중천에 떴다. 이글거리는 열기 아래서 듀란은 숨을 헐떡였다. 다행스럽게도 적혈마는 아직 기운이 있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듀란은 저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아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상비하고 다니는 작은 깃발 중에 노란 것을 꺼내어 마구 흔들었다.
 이제야 길이 마련되어 북부군을 출발시킨 샤르미나는 겨우 보일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깃발 같은 것을 흔드는 기마병을 발견했다. 그녀는 옆에 있는 전령을 시켜 상대를 데려오도록 했다.
 총사령관의 명령에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간 전령은 그 기마병과 함께 말머리를 같이하여 돌아왔다.
 "형수님!"
 뚱뚱한 몸집에 머리카락이 홀랑 까져 깃발을 흔들던 사람은 바로 듀란이었다. 샤르미나는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그를 째려보면서 맞아들였다.
 "럭시 경은 어찌하고 그대만 왔나요?"
 "대장이 작전대로 얼음땡이들 두들기라고 해서! 아니 이게 아니라……. 끙. 그 얼음땡이 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여태 한 마리도 못 봤는뎁쇼. 지금 대장은 친위대랑 같이 한 판 뜨고 있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왜 그와 같이 있어주지 않은 거에요!"
 샤르미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지휘봉을 흔들었다. 울음을 터뜨릴듯한 그녀 앞에서 듀란은 할 말이 없는지 입맛만 다셨다.
 
 중군보다 한참 앞서 가던 도중에 크림슨액스와 합류한 로베르토는 그들로부터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
 "그렇다면 럭시 발레인 경이 상대하는 녀석들이 본대일겁니다! 서두릅시다!"
 로베르토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5천의 기마병과 크림슨액스는 금방 적군을 발견했다.
 "전군! 장착! 투창!"
 기마병들은 안장에 달고 있던 단창을 꺼내어 한 손에 쥔 채 달렸다. 그리고 눈에 확연히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자 일제히 창을 던졌다.
 부우우웅.
 공기를 찢어 가르는 수천 발의 창이 얼음의 군대를 깨부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날아온 창에 목이 뚫리거나 낙마하는 등 루인 측은 공황 상태가 되었다. 잠깐의 틈 속에서 로베르토는 럭시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럭시 발레인 경!"
 "이게 누구야! 여전히 화끈한 솜씨잖아? 로베르토! 하하하!"
 럭시는 적혈마를 잃었는지 토마호크를 든 채 서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반쯤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럭시 경.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저녀석들은 선발대입니까?"
 로베르토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북부군의 기마병과 크림슨액스에게 도륙당하는 적의 추적대가 있었다.
 "아아,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다. 날 쫓던 놈들인데 제법 매웠어. 샤르미나는?"
 "총사령관 각하는 무사하십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여기서 벗어납시다!"
 "이봐. 언제부터 로베르토가 겁쟁이가 됐어?"
 럭시는 어이없어하며 도끼를 등에 메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한 방 먹은 거 같은데,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지 않겠어? 오호. 마침 저쪽에서 오잖아."
 주변에서 주인을 잃고 알짱거리던 말을 한 마리 잡아서 올라탄 럭시는 로베르토를 내버려둔 채 다가오는 얼음의 군대를 향해 움직였다. 로베르토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마병을 수습해 그의 뒤를 쫓았다.
 얼음의 군대는 숫자가 상당했다. 비록 5천의 기마병과 크림슨액스가 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나마 백병전의 달인 크림슨액스가 있는 것이 위안이 될 정도다. 럭시는 홀로 앞으로 나아가 진군을 멈춘 얼음의 군대를 향해 소리쳤다.
 "누가 대장이냐!"
 그 도발하는 소리에 대검을 쥔 거한이 앞으로 나섰다.
 "이프리트 정벌군 사령관 다니엘이다. 제법이군. 사로잡으려고 보냈는데 말이야."
 "난 다 죽이려고 했는데?"
 싱글거리며 웃는 럭시에게 다니엘은 대검을 겨누었다. 럭시는 '응?' 하고 묻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죽이기는 아깝군. 일기토를 신청한다. 재밌게 해주면 네놈만 죽여주지."
 "……크크크. 하하하하! 아아, 간만에 두근거리는군! 좋아! 울면서 후회나 하지 마라! 그런데 말이야! 나는 배포가 크거든! 가자 이것들아!"
 "히이이하!"
 럭시의 공격 명령에 크림슨액스들이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루인 측도 곧 대응에 나섰고, 후퇴를 주장했던 로베르토도 어쩔 수 없이 기마병을 돌격시켰다. 또 다시 난전이 벌어졌다.
 크림슨액스가 내던진 도끼에 루인의 병사 두 명의 목이 달아나고, 로베르토의 기마병이 찌른 창에 루인 병사들의 심장이 터졌다. 피가 사방에서 튀며 시체가 하나 둘 늘어만 갔다. 주인이 죽었는지도 모르고 시체를 태운 체 사방을 돌아다니는 말이 있는 가 하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다가 교관의 칼에 이승을 뜬 병사도 있었다.
 피가 흐르는 격전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리석은 놈."
 "난 당한 만큼 돌려주자는 주의라서. 사실 울화통 터진 건 당신 아냐? 우리 본대는 아직 멀쩡하다고. 이 정도에 발이 묶여서야……, 허접하긴."
 다니엘이 대검을 종으로 내리그었다. 묵직하고 또 그만큼 날카로운 검격이 럭시의 미간을 쪼갤듯했다. 하지만, 어느새 토마호크를 들어 대검을 쳐낸 럭시는 도끼답지 않은 쾌속으로 다니엘의 왼팔을 노렸다. 그러자 그는 애마 로른의 배를 차, 뒤로 물러났다. 깔끔한 기마술이다.
 이번에는 럭시의 차례다. 그는 토마호크로 여러 번 대검을 때려 다니엘의 손을 봉쇄했다. 양손을 사용하는 이상, 그의 공격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공격을 방어하기만 할 뿐 공세로 전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먼저 손을 든 건 럭시였다.
 "하, 정말 괴물 같은 놈이네."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야. 우리 내려서 할까? 너도 근질근질하지?"
 럭시가 말에서 내렸다. 다니엘도 그 제안이 흥미가 동했는지 마찬가지로 말을 버렸다. 두 사람은 대지에 발을 딛고 서서 자세를 잡았다.
 "내 필살기를 보여주는 건 네가 처음이다. 이거 맞고도 멀쩡하면……, 내가 진 걸로 하자고!"
 미증유의 기운이 럭시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깜짝 놀라더니 대검을 고쳐 잡았다. 붉게 더 붉게 변하는 럭시의 몸은 절정에 달한 것 같은 순간 움직였다.
 럭시는 단 한 번 토마호크를 찍어 내렸다. 그런데 다니엘이 본 것은 정확히 두 개였다. 하나는 그의 미간으로 다른 하나는 오른쪽 어깨를 노리며 날아왔다. 하지만, 다니엘은 경험이 많았다. 그렇기에 이상한 공격을 전부 맞아가면서 럭시의 얼굴과 가슴을 베어버릴 수 있었다. 이것으로 승부는 났다.
 "……쿨럭. 크. 사실 이거 미완성이라고. 원래는 네 개가 날아야 하니까. ……젠장."
 다니엘은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잡고, 이마에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럭시를 보았다.
 "얕봤나……. 그 기운, 처음 보는 거였지만 강했다. 하필이면 상대가 나라니 운이 나빴군."
 그들의 싸움이 종막에 도달한 무렵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3
 샤르미나는 그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그런 현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녀가 북부군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 럭시는 다니엘의 검에 쓰러지고 있었다.
 "럭시!"
 외마디 비명에 다니엘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피와 살점이 떨어지는 전장에서 맨손으로 달려오는 여자를 보았다.
 '연인……, 인가.'
 다니엘은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말에 올라 이곳을 떠나갔다. 샤르미나는 럭시의 상태를 보는 게 더 급했다. 위생병을 부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어찌할 줄을 모른 체 눈물을 흘렸다. 초보자인 그녀가 보아도 사랑하는 남자의 목숨은 이미…….
 "……으."
 럭시가 신음을 내며 정신을 차렸다. 샤르미나는 그를 편하게 해주려고 무릎 배개를 해주었다. 내장이 다 드러날 정도로 깊이 베인 검상과 거의 갈라지다시피한 이마에는 피가 철철 흘렀다. 여지껏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바람이 불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샤르미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하고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적어도 마지막은 같이 있어 주자고 그녀는 생각했다. 럭시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항상 마주 잡았던 그 손. 운동을 하고 나면 시원한 물수건을 건네주었던 그 손. 산책을 갈 때마다 가슴께에 올려놓아 마음 아프게 했던 그 손.
 '당신이 보이지 않아.'
 어떤 얼굴을 한 걸까? 우는 걸까? 그런 의문이 럭시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가 그의 눈을 적셨다. 샤르미나가 옷깃을 찢어 닦아주었지만, 그는 결국 연인의 얼굴을 되새겨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바람이 지고 싸움은 끝이 났다.

by 글사랑 | 2009/12/08 10:22 | * Heiligen Krieg | 트랙백 | 덧글(2)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